[헤럴드경제=오연주 기자] 아플 때 생각나는 과일이 있다. 병문안 갈 때 인기품목인 황도나 백도 통조림이 대표적.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육을 씹으면 병실의 우울한 기운까지 날릴 수 있을 것 같다.
배도 그렇다.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환절기 감기라도 걸렸다치면 생각나는 과일이 바로 배다.
찬 기운에 놀라 마른 기침을 몇번 하고나서 배 생각이 절로 나는 것은 배와 지금까지 쌓아온 기억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기침감기가 심했을 때 엄마가 해주던 따끈한 배꿀찜이 생각나기도 하고, 열을 내리기 위해 시원하게 먹던 배 한 조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 식당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배 한조각에 더 익숙해졌다면 배가 소화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가을 제철을 맞아 추석 차례상에 올라갈 준비가 한창인 배는 올해 풍작으로 더욱 알뜰하게 즐길 수 있어 금상첨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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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걸린 아이도, 숙취 시달리는 아빠도 배 먹어요
예로부터 배는 기관지 질환이 있을 때 민간요법으로 많이 먹던 과일이다. 특히 쓴 약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한테 약 대신 먹이기도 유용하다. 배에는 루테올린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바로 이 성분이 기침, 감기 등의 기관지 질환에 효능이 있다. 배는 해열기능도 있어 열이 날 때 먹어도 효과가 있다.
배의 대표적인 효능 중 하나는 소화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배에는 소화를 돕는 인버타제(invertase), 옥시다제(oxydase) 같은 효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고기를 먹었거나 과식을 했을 때 후식으로 많이 즐긴다.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성분이 있어 고기를 양념에 재울 때 배를 갈아서 넣는 것은 기본 요리 상식의 하나로 통한다.
배에는 아스파라긴산, 구연산, 사과산 등의 다양한 종류의 산도 풍부하다. 배의 상큼한 단맛 속에는 소르비톨이라는 성분이 들어있어 변비를 개선하고 소화를 돕는다. 사과와 배를 비교할 때 배가 더 달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사과의 당도가 더 높다. 배가 더 달게 느껴지는 이유는 석세포라 불리는 리그닌과 펜토산이란 성분의 식이섬유 덩어리 때문으로 석세포는 씹을 때 과즙을 내어 배를 더 달게 한다. ‘배 먹고 이 닦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도 석세포가 이 사이에 낀 플라크를 제거해주기 때문이다.
배는 식이섬유 덩어리 답게 변비와 장운동에도 도움을 준다. 식이섬유의 일종인 펙틴도 풍부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데도 효과적. 또 배에는 숙취해소에 좋은 아스파라긴산도 풍부하다. 배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다당류인 아스파라긴산은 간장활동 촉진 및 체내 알코올 성분의 분해를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배에는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이 들어있지만 다른 과일보다는 그 햠량이 비교적 낮은 편인데, 비타민C와 칼륨의 양은 적지 않다. 칼륨은 고혈압을 유발하는 몸속의 나트륨을 몸 밖으로 배출시켜, 혈압을 조절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배는 고혈압 예방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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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차갑고, 아삭하게 먹어야 제맛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 배와 달리 조롱박처럼 길쭉하게 생긴 배를 보게 되는데 배는 원산지에 따라 서양종과 동양종으로 나뉜다. 서양배는 씹을 때 아삭한 식감을 더해주는 부드러운 알갱이인 석세포가 적고 향기와 단맛이 강한 편이다.
우리가 주로 먹는 배는 신고 품종이다. 한말에는 황실배, 청실배 등의 품종을 널리 재배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새로운 품종인 신고배가 보급되었다. 우리 농가 재배의 80% 정도를 차지하는 신고배는 식감이 좋고 과즙이 풍부하나 약간의 신맛이 있다. 또 익숙한 이름 가운데 하나인 황금배는 신고배와 이십세기를 교배한 품종으로 당도가 높고 껍질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배를 고를 때는 껍질이 맑고 투명하며 꼭지가 끈적거리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손질할 때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껍질을 벗길 때는 최대한 얇게 벗기도록 한다.
배의 적정 보관온도는 0~2℃로 냉동되지 않을 만큼 최대한 낮은 온도에서 보관하는 것이 좋다. 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구입한 후 랩이나 신문지로 하나하나 싸서 냉장고 아랫칸에 보관하면 바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특히 배는 딱딱한 상태로 먹는 과일이므로 무르지 않도록 보관해야 한다. 과일을 후숙시키는 에틸렌 가스를 배출하는 사과와는 같이 두지 않도록 주의한다.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무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너무 완숙된 것이고, 껍질에 푸른기가 도는 것은 제대로 익지 않은 배일 가능성이 높다.